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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잡담]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명랑 히어로'를 요즘 들어 챙겨보는 이유 중 하나...
추도문에서 좋은 글구를 얻을 수 있다는 점
저번 주 '우리는 죽어서 무엇이 되는가' 이후 이번 주에는 '박미선'의 유언에서 좋은 글구를 찾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토지(土地)'의 작가이신 고(故) '박경리'여사의 '유고시집'제목인 문구에서 짧은 글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꼈다. 그래서 검색사이트에서 찾을 수 있었던 '유고시집'의 몇몇 글들을 모아봤다.
(아래 글들의 저작권은 작가와 출판사에 있습니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불가하며 여기 글 또한 저작권법적으로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박경리 유고 시집
: 박경리 저, 마로니에북스, 2008년 6월 출판

산다는 것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들면
바쁜 듯이 뜰안을 왔다 갔다
상처나면
소독하고 밴드하나 붙이고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약도 죽어라고 안 먹었다
인명제천
나를 달라는 데
그보다 생광스런 말이 또 있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 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바느질

눈이 온전했던 시절에는
짜투리 시간
특히 잠 안 오는 밤이면
돋보기 쓰고 바느질을 했다

여행도 별로이고
노는 것에도 무취미
쇼핑도 재미없고
결국 시간 따라 쌓이는 것은
글줄이나 실린 책이다

벼개에 머리 얹고 곰곰히 생각하니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



육신의 아픈 기억은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덧나기 일쑤이다
떠났다가도 돌아와서
깊은 밤 나를 쳐다보곤 한다
나를 쳐다볼 뿐만 아니라
때론 분노로 떨게 하고
절망을 안겨 주기도 한다
육신의 아픔은 감각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삶의 본질과 닿아 있기 때문일까
그것을 한이라 하는가

마음

마음 바르게 서면
세상이 다 보인다
빨아서 풀 먹인 모시 적삼같이
사물은 싱그럽다

마음이 욕망으로 일그러졌을 때
진실은 눈멀고
해와 달이 없는 벌판
세상은 캄캄해질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욕망
무간 지옥이 따로 있는가
권세와 명리와 재물을 쫓는 자
세상은 그래서 피비린내가 난다

소문

세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는 내게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소문은 있었다
소문이란 본시 믿을 것이 못 되고
호의적인 것도 아니어서 덕될 것이 없다
살기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그러거나 말거나 알 바 아니지만
놀고 먹는 사람들에게 생광스런 소일거리

사실은 그것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얘기
옛날에는 바람따라 왔던 소문이
이제는 전파에 실리어 오고
양적으로나 속도로 보아 실로 엄청나다
뿐이겠는가
불 땐 굴뚝에 연기가 아니냐고
불 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마술 같은 일들이 진행중이다

소위 자본주의 방식의 하나이며
정치가들 뒤질세라 편승하는 열차편
거대한 산업
어디로 가나 세상 구석구석
광고의 싸락눈 안 내리는 곳이 없다

천문학적 자본을 쏟아 붓고
인력을 쏟아 붓고
시간을 쏟아 붓고
그것으로 먹고 산다
그것으로 돈 벌어 부자가 된다
그것은 정치 전략의 요체가 되었다

그것으로 먹고 사는 함정에서
사람들은 빠져나갈 수가 없다
소비가 왕인 정경합작의 괴물을
그 누가 퇴치할 것인가
천하무적의 폭군이 지나간 자리엔
영세민의 수만 늘어나고
얽히고설킨 이른 봄
연못의 맹꽁이 알처럼 파산자가 떠돈다

옛날에 내가 꽃을 심었을 때
옷 나오나 밥 나오나 하면서 어머니는
꽃모종을 뽑아 버리고 상추씨를 뿌렸다
그땐 내가 울었지만
옷 나오지도 않고 밥 나오지도 않고
좁살 알갱이 한 톨 떨구어 주지 않는 광고는
그러면 꽃인가, 종이꽃이다
자본주의의 요염한 종이꽃이다
씨앗도 없는 단절과 절망의 종이꽃